누가복음57강
제목 :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본문 : 누가복음18:1~8
추석 명절을 앞 둔 주일에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성도님들과 부모님이 신앙생활하고 있는 모교에 오신 형제, 자매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환영합니다. 고향이 있어도 부모님이 안 계시면 그 곳은 타향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진짜 고향은 부모님이 계신 곳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더불어서 우리가 천국을 우리의 영원한 본향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를 낳고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늘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추석 명절이면 떨어져 살던 부모님을 뵈옵고 흩어져 살던 가족이 다시 모일 수있는 기회가 되어 좋은 것 같습니다.
더불어 교회 또한 천국가족공동체인데 추석명절에 서로 문안하고 선물하고 덕담하고 축복하면서 더욱더 친밀한 영적가족임을 느낄 수 있어서 감사가 됩니다. 저도 두 분의 원로목사님께 인사드리고 또한 영적 멘토이신 차종순 전 호신대 총장님과 홍지훈 교수님을 찾아뵙고 인사드렸습니다. 또한 주변의 영적 동역자들과도 서로 문안하고 선물하고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또 우리교회 은퇴 원로장로님들께 식사대접 한 번 하고 싶어서 날짜를 잡았습니다. 이번 추석명절을 보내면서 온통 내가 은혜로 살고 있구나! 내 주변에 너무나도 많은 영적 가족들이 있구나! 느끼면서 감사 감사하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번 추석명절에는 우리교회에 이일수 전임전도사님과 박은진 교육전도사님이 새 식구로 청빙 받아 인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더 이번 추석 명절은 감사가 넘치고 의미있고 기쁨이 됩니다.
우리 조상들은 추석을 ‘중추절’ 이라고도 하고 ‘한가위’라고도 했습니다. 중추절은 ‘가을의 한가운데 있는 명절’이라는 뜻이고 한가위란 ‘가을의 한가운데 있는 큰 날’이란 뜻입니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고 했습니다. 가을 한가운데 있는 추석 명절은 오곡백과가 탐스럽게 익는 일 년 중 가장 먹을 것이 풍족한 날입니다. 어떻게 보면 1년 중 가장 풍족하고 넉넉하고 감사가 넘치는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입니다.
어제 밤 교회 주변을 슬로우 런닝하면서 밤하늘에 밝게 빛나는 한가위 대 보름달을 한참 바라 보았습니다. 마치 대낮처럼 환하게 비추는 보름달을 보면서 나의 믿음이 이 어두운 세상을 대보름달처럼 환하게 비추는 삶이 되고 싶다고 기도했습니다. 또한 우리광주동광교회가 저 한가위 대 보름달처럼 꽉 찬 믿음 꽉 찬 구원의 기쁨 꽉 찬 사랑으로 광주를 환하게 비추는 보름달 같은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더불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처럼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신앙생활의 열매가 풍족하고 탐스럽게 주렁주렁 맺히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한가위 대보름달처럼 우리의 삶이 밝게 빛나고, 한가위처럼 우리의 삶이 넉넉하고 풍족하고 기쁨이 가득했으면 좋겠는데...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늘 불안과 두려움 염려와 죄책감 슬픔과 외로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에 요양병원에서 항암치료받던 있던 한 집사님이 기도 부탁을 한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갔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눈물을 줄줄 흐리셨습니다. 지쳐있고 외로움과 염려와 두려움이 교차한 눈빛에서 함께 아픔을 느꼈습니다. 어제 밤에는 한 장로님의 형수님이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님처럼 의지하던 분이셨는데 갑작스럽게 세상을 등진 형수님을 떠나보내면서 마음이 무너져 어찌할바를 모르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잠시 후에 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는데 이 번에는 한 권사님의 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청년 때부터 섬겼던 제자였는데 너무나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서울에서 수술받았던 한 권사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복잡한 수술인데 잘 끝났다고 기도해주어서 고맙다는 인사 전화였습니다.
목회현장에서 성도들과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는 일들이 매일 매일 일어납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나올듯한 그런 인생살이의 이야기들이 우리 성도님들의 삶 속에서 그대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당혹스럽습니다. 아무 힘도 능력도 없는 목회자가 뭐라고 기도해주고 말씀으로 권면해 주고 위로해주면 얼굴에 생기가 도는 성도님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이 교회의 주인이시고 이 교회에서 일하고 계시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목회는 사람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이구나 이런 고백을 다시 한 번 하게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말씀은 우리의 메시야요 구원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지쳐있는 심령, 외로움과 두려움 낙심과 절망에 빠져 있는 심령이 있다면 이 시간 생명의 말씀을 통해 다시 일어나시기를 기도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항상 기도하라는 뜻은 규칙적으로 쉬지 않고 지속적으로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루에 9시, 12시, 3시 세 번 정한 시간에 규칙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구약에 다니엘, 신약에 베드로 요한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규칙적으로 기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되 규칙적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상황, 어떤 환경에서도 규칙적으로 습관적으로 항상 마음을 열어 내 삶의 문제를 놓고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가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기도하지 못하고 도중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낙심하기 때문입니다. 낙심, 포기하는 마음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기도의 응답이 빨리 오지 않는다고 낙심합니다. 기도하는데도 상황이 호전되지 않고, 도리어 상황이 악화되는 것처럼 보일 때에 낙심합니다. 눈 앞에 펼쳐지는 상황이 도저히 소망이 보이지 않을 때에 기도할 마음을 잃고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우리가 지속적으로, 꾸준히 끈질기게 기도하기 위해서는 낙심케 하는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목회하면서 성도를 위해 삼일 금식을 세 번 한 적이 있습니다. 젊은 한 권사님이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을 때 하나님께 승부수를 거는 마음을 삼일 금식기도했습니다. 그 권사님을 살려달라고 ... 그런데 데려가셨습니다. 또 한 번은 막내 여동생의 생명이 위독할 때 또다시 삼일 금식 기도를 했습니다. 살려달라고 이번만은 내 기도를 들어달라고 그런데 막내 여동생을 데려가셨습니다. 또 한 번은 한 장로님의 큰 인생 문제를 놓고 삼일 금식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 기도제목을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기도에 대한 세 번의 실망감은 때때로 내 기도는 안 들어 주신다!는 이상한 낙심이 내 안에 생겨났습니다. 기도하면서도 때때로 믿음이 안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의 기도를 낙심하게 하는 가장 무서운 대적자는 다름 아닌 사탄 마귀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항상 기도하는 것을 막는 가장 큰 대적자는 사탄 마귀입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기도에 대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기도하고자 하면 시작도 하기 전에 오만가지 훼방꾼들이 한꺼번에 달려듭니다. 사단은 여러 가지 이유를 총동원하여 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사방에서 에워싸고 극렬하게 방해공작을 폅니다. 열심히 기도하기로 작정할수록 사단은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잡념들로 달려들어 시작조차 못하게 합니다” 루터가 고백했듯이 기도는 사단과의 치열한 영적 전투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부정적인 생각, 어두운 생각, 절망적인 생각,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이것이 사단이 심는 궤계임을 알고 치열한 영적전투를 벌여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상황이 좋을 때나, 어려울 때나, 가능성이 있어 보일 때나 없어 보일 때나, 항상, 줄기차게, 지속적으로 낙심하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응답이 우리의 방식으로 우리가 원하는 기대 대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응답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한 기도보다 훨씬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을 포기만 하지 않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낙심치 않고 기도해야 할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한 가지 비유를 드셨습니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었습니다. 본래 재판장은 공정하고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재판장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무시하는 공정함과 자비심을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그런 불의한 재판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재판장을 상대로 도움을 청하는 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과부는 당시에 힘없는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 무슨 소설 제목 같잖아요? 여기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최악의 상황입니다.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본문을 보면 이 과부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과부는 불의한 재판장이 눈길 한 번 주지 않아도 ‘자주’ ‘늘’ 그에게 갔다고 했습니다. 자주, 늘 가서 무엇을 했습니까? 자주 가서 번거롭게 하고, 늘 가서 괴롭게 했습니다. 물론 그때마다 불의한 재판장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면담을 거부하고 화내고 쫓아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부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과부는 자주 늘 가서 때마다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내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주소서” 여인은 사무실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외쳤습니다. “내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주소서” 때로는 늦은 밤에도 재판관의 집 앞 대문에 서서 흐느끼며 말했습니다. “제 원한을 풀어 주세요” 때로는 이른 아침 출근길에도 나타나 부르짖었습니다. ‘재판장님 내 원수에 대한 원수를 풀어주세요 저는 억울합니다’ 점심 식사 시간에도 밥 먹는 식당을 향해 울면서 소리쳤습니다. ‘재판장님 제 원한을 풀어주세요’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습니다. 과부가 한을 품고 외쳐대니 그 목소리가 얼마나 애절하고 구슬펐겠습니까? 원래 이 재판장은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무시하던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는 교만 덩어리로 뭉친 불의한 사람입니다.
그런 재판관도 유일하게 무서운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 과부 아줌마였습니다. 여인이 무슨 권력을 가져서 두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집요함, 그 끈질김, 그 악착같음, 그 앙칼짐, 그 핏발서린 눈동자, 꿈에 나타날까 싶은 구슬픈 목소리, 그 애절함에 재판장은 마침내 두 손, 두 발 들고 만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재판장은 과부의 한을 품은 불도저 정신에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도저히 승산이 없어 보이던 재판이 과부의 승리로 끝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과부의 낙심하지 않고 자주 늘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는 포기치 않는 간구, 한 맺힌 간청이 불의한 재판장의 마음까지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어떻습니까? 불의한 재판장이 아니라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7절 말씀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낙심하지 않고 끈질기게 간청한 과부의 한 맺힌 간청도 중요하지만 불의한 재판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신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이 반전의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장과 차원이 다른 분입니다. 많은분들이 기도해도 잘 응답이 되지 않는 경험을 하면서 마치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관처럼 기도의 응답에 인색한 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기도를 하나님은 안 주시려고 하는데 억지로 빼앗아 내고자 떼쓰고 협박하는 것이 기도라는 착각을 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불의한 재판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찬양 가사 중에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는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주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출애굽기 1장에 보면 우리의 고통을 보고 듣고 알고 내려오셔서 건져내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공의도 사랑도 없는 불의한 재판관도 낙심하지 않으면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불의한 재판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 많으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너희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지 않겠느냐? 생각 좀 해보라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늦게 기도를 들어주었지만 하나님은 속히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외아들까지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아버지도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아닙니다. 무능력한 아버지가 아닙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무정한 아버지가 아닙니다. 자기생명까지도 내주시는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이십니다. 자녀의 작은 신음소리까지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전능하신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왜 기도의 특권을 누리지 못합니까? 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믿음이 없기 때문에 기도의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조금 기도하다가 슬그머니 포기해 버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믿어야만 합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목회데이터연구소가 발간한 ‘한국교회트렌드2026’에 따르면 최근 3년 동안 기독교인이 무속을 이용한 평균 횟수가 2.7회로 일반인과 동일했다고 보고했습니다. 특히 20대 기독청년들은 4.3회로 일반인들보다 더 자주 무속 이용을 했습니다. 기독교인으로 무속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습니다. ‘굿을 해도 된다’ 비율이 17%, ‘부적을 해도 된다’에는 24% 4명 중 1명이 ‘괜찮다’로 나왔습니다. 고사 지내는 것은 어떤가? 이 질문에 3명 중 1명이 그럴 수 있다. 기독인들 중 점 보는 것은 절반이 문제가 없다고 답했습니다. 한마디로 무속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 교회성도들은 어떨지 궁금해 집니다.
왜 현대인 성도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기 보다 무속을 의지하는 경우가 많을까요? 그 이유가 뭘까요? 지용근 목회데이터연구소 대표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즉각적인 위로와 해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속인을 찾아가면 바로 그 현장에서 즉각적 위로와 평안과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었던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무속은 우리들에게 즉각적 해답과 위로를 줄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우리를 죄와 사망의 두려움과 염려에서 고통과 외로움에서 건져내지 못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하나님은 택하신 당신의 자녀들의 기도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원한을 풀어 주십니다.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문제 앞에서 낙심하지 말고, 원망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특별새벽기도회가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신음까지 들으시는 주님께 나아가 부르짖음으로 우리의 기도에 가장 선하고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추석명절에 다시 한 번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대보름달처럼 꽉 차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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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 누가복음47강(제목: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세 가지 각오) | 김성철 | 2025-07-21 | 60 | |
65 | 누가복음46강(제목 :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 김성철 | 2025-07-13 | 61 | |
64 | 25년맥추감사주일말씀(제목: 감사가 광야 인생길의 최고의 무기입니다) | 김성철 | 2025-07-09 | 190 | |
63 | 온세대예배말씀(제목:분노를 다스리는 성경적 방법) | 김성철 | 2025-06-30 | 67 | |
62 | 누가복음45강(제목: 무엇이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냐?) | 김성철 | 2025-06-25 | 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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