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50강
제목: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본문: 누가복음15:14~24
누가복음 15장은 양 백 마리 중에 잃어버린 한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와 열 드라크마 중에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면서 찾기까지 찾는 한 여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이 회개하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이 세 가지 비유의 이야기의 청중은 누구입니까? 1~2절을 보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께 가까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면서 예수님을 향해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면서 비난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향해서 그리고 또 한 부류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와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비유, 그리고 마지막으로 탕자의 비유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아마도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이 세 가지 비유에 대해서 굉장히 감동있게 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았을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세 번째 비유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집은 많은 종들을 부리고 있는 양식이 풍족하고 부족함이 없는 부요한 집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인격적이셨고, 지혜롭고, 사랑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에게 자기 분깃을 달라고 합니다.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아버지 돌아가시면 내가 받을 유산 있잖아요? 어차피 나중에 주실 건데 지금 좀 미리 땡겨서 주시죠”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칼만 안 들었지 아들이 아니라 순전히 강도와 같은 자식입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 아버지가 건강하시고 유산을 물려주려는 마음을 아직 결정하지 않았는데 아들이 먼저 유산을 달라고 말하는 것은 굉장히 무례하고 불효막심한 자식의 태도였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기 B.C 180년경에 기록된 외경인 집회서 33:20~24절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너는 아들이건 아내건 형제건 친구건 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에게도 권력을 양도하지 말아라. 너의 재산을 아무에게도 주지 말아라. 나중에 그것이 아쉬워 후회할 것이다... 네 수명이 다하여 죽을 때가 오거든 네 재산을 나누어 주어라” 다시 말해 예수님 당시에 아버지가 재산을 미리 아들에게 나눠 줄경우 아버지의 입장이 처량해질 수 있다고 하여 아버지에게 재산을 미리 나눠주지 말라고 훈계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많은 영상매체에서 자식에게 미리 유산을 상속해 주지 말라고 합니다. 유산을 미리 물려주었다가 노후가 비참해지는 많은 어리석은 부모님의 사례를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둘째 아들은 왜 아버지에게 이런 말도 되지 않는 불효막심한 요구를 것입니까? 사실 이 이야기는 알레고리적 성격이 있는 비유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멋대로 살고자 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마치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의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내가 하나님이 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사는 것이 더 행복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내 생각대로 내 계획대로 사는 인생은 대박 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보실 때 둘째 아들의 요구는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분명히 사고 납니다.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타락하여 허랑방탕하게 살게 될 미래가 불 보듯 뻔합니다.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요구를 다 들어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아서가 아닙니다. 아들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무엇보다 인단의 타락한 자유의지의 욕망은 아무리 말해도 꺾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고집부리고 있는 둘째 아들의 잘못된 선택을 경험해보도록 그의 모든 요구를 들어줍니다. 결코 잔소리가 하지 않았습니다. 상속해 준 재산을 몇일 안에 빠르게 매각 처분 할 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믿어주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결국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챙겨 먼 나라로 갔습니다. 아버지의 간섭이 없는 곳, 아버지의 그림자도 안 보이는 곳으로 숨어버렸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곳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맘대로 사는 인생에 성공이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정말 아버지를 떠나서 자기 계획대로 야망대로 꿈꾸는대로 도전해서 행복하게 살았을까요?
13-16절 말씀입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먼 나라로 간 그는 그곳에서 그는 돈을 잘 굴려 큰 돈을 벌어서 멋지게 살아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곁을 떠난 아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같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습니다. 아무도 통제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창녀와 함께 놀아나고 돈을 물 쓰듯이 썼습니다. 그런데 그 재산을 다 낭비한 후에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돈이 있을 때 찾아오던 사람들은 하나 둘씩 떠났습니다. 그는 비로소 궁핍해졌습니다. 그는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결국 유대인이 해서는 안 되는 돼지 치는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선민으로서의 정체성 포기를 의미합니다. 또한 돼지 먹이를 구하는 모습은 인간의 존엄성까지 잃어버렸음을 상징합니다. 악덕 기업주 주인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맘껏 먹지 못하도록 감시하였습니다. 그는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 허랑방탕하게 살아가다 결국 비참한 지경에 빠진 둘째 아들의 비극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들의 비극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죄는 하늘 아버지의 품을 떠나 인간의 악한 본성대로 살아가려는 태도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만으로 채워지는 심연이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원래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도록 디자인되어 있습니다. 전도서 3:1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래서 인간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내 안에 찾아와 머무르게 될 때에 비로소 영혼의 안정과 평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도 파스칼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내 마음이 주님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주님을 불러 기도하오니 나는 주님에게서 돌아설 때 넘어지게 되고 주님을 향해 되돌아설 때 일어나게 되며 주님 안에서 머물 때 든든히 서게 됩니다. 주님을 떠날 때 죽게 되며 주님에게 돌아갈 때 소생하게 되고 주님 안에 거할 때 참으로 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새겨져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결코 하나님의 품을 떠나 행복할 수 없고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린 아기는 황금 침대에 누워 있을 때 행복한 것이 아니라 엄마의 품 안에 있을 때 행복합니다. 물고기는 물에 있을 때 행복합니다. 새는 공기 속에 있을 때 행복합니다.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릴 때 안전하고 행복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나님의 품 안에서 있을 때 행복합니다.
결국 둘째 아들은 스스로 돌이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아버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17/`18) 그리고는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고자 첫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둘째 아들은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으면 비로소 제정신이 들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자기의 진면목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얼마 부요하고 자비롭고 사랑이 많은 아버지의 자녀였던가! 나는 아버지의 품속에서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았던가! 아버지의 보호아래에서 나는 얼마나 평안했던가!’ 하나님의 자녀는 고난의 때에 비로소 제정신 듭니다. 고난의 때에 자기를 돌아봅니다. 나의 한계와 연약함을 알고 겸손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고난 속에서 발버둥 치며 불평과 원망을 일삼다가 그대로 사라집니다. 고난이 유익이 되지 못하고 삶을 파멸시켜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고난 때문에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고난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라 고 했고 또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래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다 고난을 받고서야 참된 인생의 의미를 알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고난은 인간을 죄악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목적으로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욥처럼 신앙을 더욱더 단련하여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고 정금같이 나오게 하는 용광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종종 고난이라는 가시가 있어서 나는 연약한 한 줌의 흙과 같은 연약한 존재임을 알고 더욱더 하나님을 의존하게 하고자 하나님은 영혼의 가난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난이 곧 은총이다’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둘째 아들은 죽게 되었을 때 마침내 아버지께 돌아가고자 결단하고 그 첫발을 떼었습니다. 그는 재수 없게 흉년이 찾아왔다고 환경 탓을 하거나 자신이 노력을 하지 않아서 죽게 되었다고 자학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으로 인해 살 희망이 없다고 자살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잡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아버지를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고 아버지를 떠나 자신의 마음대로 산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떠난 것이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서 얼마나 죄를 지은 것인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염치 없지만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바로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회개는 모든 고통의 원인이 하나님을 떠난 삶이었음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에 안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마음 속에서 경외하고 존중히 여겨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하나님께 순종하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회개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때 아버지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이 희미하여 잘 보이지 않는 거리에서도 아들임을 발견하고 측은히 여겨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떠나는 날부터 날마다 문 밖을 보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늙은 아버지가 뛴다는 것은 당시 관습에 맞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달려갑니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들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권위가 상실되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상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의 목을 안습니다. 돼지 똥 냄새나도 괜찮습니다. 아들이 미리서 연습한 말을 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리고 다음 말을 하려고 하는데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을 못하게 용서를 상징하는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는 목욕을 시키고 명예를 회복시키는 제일 좋은 옷을 입힙니다. 아들의 권위를 상징하는 가락지를 끼워줍니다. 너는 종이 아니라 내 아들임을 확인하는 신발을 신겨줍니다. 그리고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배풉니다.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떠났을 때 죽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온 것입니다. 죽은 내 아들이 살아났다! 이것이 바로 회개하고 돌아오는 인생들을 맞이해 주시는 하늘 아버지의 용서의 사랑인 것입니다.
스바냐 3:17절은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그들을 맞이하는 하나님의 기쁨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놀라운 성경의 말씀입니다. 주님께 돌아온 나를 향해 주님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목욕을 시키고 제일좋은 새옷을 갈아입이시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기고 잔치를 배풀어 주시는 분이십을 기억합시다. 파스칼은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만으로 채워지는 심연이 있다”고 했는데 반대로 “하나님의 마음에는 나만이 채울 수 있는 구명이 있다”는 것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제가 많이 사랑했던 막내 여동생이 3년 전에 먼저 하나님 나라에 갔습니다. 그 구멍이 저에게 있습니다. 가끔 막내 여동생을 생각하면 마음에 통증이 느껴집니다. 그런데요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당신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도 그런 통증을 느끼는 구멍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한 하나님은 그 구멍을 가진채 날마다 하나님을 떠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첫째 아들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아버지께서 작은 아들을 위해 잔치를 여는데 밭에서 일하고 있던 아들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집에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종으로부터 자초지종 듣더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습니다. 그리고는 집안에 벌어지는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합니다. 아버지가 이 소식을 듣고 큰 아들에게 찾아갑니다. 이 때 큰 아들이 아버지께 따집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개역개정성경에는 빠져 있으나 원어에는 “Look(보세요)“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고 아버지를 향해 ‘보세요’하면서 불경스럽고 모욕적인 표현을 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친근감이나 공경심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처사가 못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놀라운 것은 아버지가 사용했던 이 내 아들(this son of mine)을 뒤집어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 동생을 ‘당신의 이 아들’(this son of yours)라고 부릅니다. 동생을 형제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근데 제가 장남이라서 그런지 첫째의 분노가 이해가 됩니다. 아버지 속을 썩이고 문제만 일으키다 온 둘째와 달리 첫째는 그동안 아버지 집에 거하며 문제 한번 일으키지 않고 착실히 살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아버지께서 시키시는 것은 군말 없이 순종하며, 착하고 성실하게 지내왔습니다. 방금도 열심히 밭에서 일을 하다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집 나갔던 망나니 둘째가 돌아왔고, 아버지는 둘째를 쫓아내시기는커녕, 둘째를 위해 잔치를 벌이 송아지까지 잡으셨습니다. 염소 새끼 하나 얻어먹어 보질 못한 첫째의 마음은 아버지를 향한 원망과 눈치 없어 보이는 둘째를 향한 분노로 가득차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원망과 분노는 첫째 스스로가 아버지와의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한데서 발생한 감정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31절입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아버지는 첫째와 항상 함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맏아들에게도 재산을 상속하여주셨습니다. 아버지의 것은 다 맏아들의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첫째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아들은 송아지뿐 아니라 암소도 잡아먹어도 됩니다. 한 마리뿐 아니라 여러 마리를 잡아먹어도 됩니다. 그는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 은혜를 즐길 줄 몰랐습니다. 아버지 곁에서 풍요롭게 살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인 줄 몰랐습니다. 둘째가 그렇게 죄를 짓고 고통하고 있을 때 자신은 아버지 집에서 풍요롭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 행복인 줄을 몰랐습니다. 그는 복음을 몰랐습니다. 그는 율법적이었습니다. 아버지와의 인격적인 관계성이 없이 아버지를 주인으로 여기고 자기는 일꾼으로 여기고 일만하였습니다. 첫째의 마음속에는 그동안 자신이 해왔던 것들만이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를 섬긴 이유가 아들로서 누리는 은혜와 감사보다는, 그저 아버지가 시키신 것에 대한 의무감과 복종으로 지속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동안 아버지와 첫째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이 아닌, 집 주인과 또 다른 일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의 몸은 비록 집 안에 있었지만 그 또한 아버지 곁을 떠난 또 다른 탕자였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또한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의 성도들의 의로운 삶보다도 오히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집 나간 탕자로 비유되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귀하게 여기시고 이것을 가장 크게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안의 성도들은 집 나간 영혼들의 실수를 정죄하고 미워하면 안 됩니다. 배척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 죄지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구원의 자리에 들어오는 것을 기뻐하며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사람에게 율법의 준행을 먼저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용서를 먼저 베푸신다는 사실입니다. 출애굽기로 말하면 유월절의 피로 구원하여 홍해에서 세례를 주고 시내산으로 데려와서 그 때서야 율법을 가르치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죄인으로부터 회개의 열매를 먼저 본 후에 용서하겠다고 하면 안 됩니다. 먼저 용서하며 받아들이고 그가 구원의 자리에 돌아온 후에 회개의 열매를 맺으면서 아름답게 신앙생활 할 수 있게 보살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용서인 것입니다. 첫째 아들의 마음을 가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마음을 내려놓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의 마음을 회복하는 한 주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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