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노트

누가복음11강(제목: 결핍이 복된 삶의 시작입니다)
2024-08-23 18:43:56
김성철
조회수   75

누가복음 11

제목 : 결핍이 복된 삶의 시작입니다

말씀: 누가복음 6:20~26

 

적당한 결핍은 우리를 복된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사람은 결핍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게 됩니다. 결핍을 통해서 공감능력을 배웁니다. 결핍에서 작은 것에도 감사를 배웁니다. 결핍은 세상을 보는 마음을 넓게 하고 시야를 높게하며 생각을 깊게 만듭니다. 특별히 결핍은 결국 하나님을 더욱더 의존하게 하여 구원의 문을 열어주고 말씀의 세계의 눈을 뜨게 해 줍니다. 자신이 얼마나 결핍되고 형편없는 자인가를 깨달았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자신의 결핍된 모습을 발견 할 때 베드로는 인류의 사도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결핍은 겸손을 낳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려는 영적 열망을 갖게 합니다. 반대로 부유함은 교만을 낳습니다. 나는 완전하고 부족함이 없다는 의식은 하늘의 신령한 복을 채우고자 하는 영적 갈망을 버리게 합니다. 그래서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이고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 되는 것입니다. 결핍이 겸손으로 연결되면 하늘의 축복의 문이 열립니다. 부유함이 교만을 낳으면 지옥으로 떨어지게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결핍이 복된 삶의 시작임을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20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가난을 불행의 조건으로 생각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것을 부끄러움과 수치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난한 사람은 겸손합니다.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에,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에 겸손합니다. 어찌하든지 배우고자 합니다. 의지할 대상이 없으니 간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면에 부유한 사람은 대체로 교만합니다. 이 땅의 쾌락과 재미에 취해서 영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이런 자에 대해서 예수님은 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부유한 자여 너희는 너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24) 부유한 사람은 이 땅에서 이미 누릴 것 다 누리고 즐길 것 다 즐겼기 때문에 하늘의 복이 임할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천국을 놓쳐 버립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역설입니까?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 비유가 나옵니다. 그는 밭에 소출이 풍성했습니다. 때문에 걱정이 없었습니다. 단지 고민이 있다면 어떻게 저 많은 곡식을 쌓아둘까? 어떻게 하면 더 큰 곳간을 지어서 소출을 저장할까? 그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얼마나 행복해 보입니까? 그는 아무런 고민이 없습니다.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할 고민 밖에는 아무런 고민이 없습니다. 정말 이런 상팔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의 영혼의 창고가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물질적으로 그는 가장 풍요롭고 행복했을지 모르지만 영적으로 그는 가난하고 불행한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들어갈 마음의 공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화 있을진저 너희 부유한 자여 너희는 너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24)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조건 가난해야 복 받는다. 부자는 비참하게 된다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가난 예찬론자가 아닙니다. 실제로 가난해도 근거없이 교만하고, 소원없는 사람 많습니다. 부자 중에서도 순수하고, 겸손하고,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신 가난은 물질적인 가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아는 가난, 자신의 무지와 비천함을 아는 가난, 자신의 죄성과 허물과 한계를 인정하는 가난, 즉 겸손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1907년 평양대부흥은 우리나라 백성들의 마음이 가장 가난할 때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전에 1894년에 청일전쟁 다시 10년 후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한국교회사를 공부하다보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후에 교회가 엄청나게 숫적으로 성장합니다. 특별히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을 맺음으로 외교권 박탈당했는데 사실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때가 1905년입니다. 이 때 우리민족은 영적으로 너무나 가난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1905W.F. Bull(부위렴:미국남장로교) 선교사는 The Missionary에서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 그리고 일본이 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심란하고 편하지 않으며 나라 자체도 어렵고 정돈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 이렇게 마음의 불확정적인 상태는 사람들로 하여금 지지와 보호를 줄 수 있는 어떤 것을 붙잡게 해 준다. 이것은 물론 복음이 약속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려는 요점은 한국인들이 수용적인 마음의 상태에 있으며 복음을 들으려 하고 또한 요청한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포획된 사슴과 같아서 제시되는 첫 번째 도피처로 곧바로 숨으려 한다. 2~3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인들에게 우리가 건네주는 쪽 복음을 받게 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개의 경우 우리가 말씀을 전하려고 부락에 가면 다들 피하고 숨었다. 이제는 이들이 쪽 복음을 먼저 요구하고 들에서 일을 쉬고 길가로 나와서 주는 쪽 복음을 받는다(19059The Missionary)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 상황의 가난한 조선인들의 마음이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했다는 선교사님의 글입니다. 가난한 마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찾게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읍시다. 복 있는 자여 너희 가난한 자들아,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반대로 화 있을찐저 너희 부유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우리 안에 가난한 마음 인생의 한계를 아는 부족한 마음 때문에 하늘의 신령한 복을 얻고자 하는 열망이 생깁니다.

 

둘째로, 주린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21) 말씀 하셨습니다. 지금 먹을 것이 없어서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른 사람은 갈급합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배부름의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옛말에 시장함이 최고의 반찬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수 십, 수 백 가지 메뉴가 차려진 뷔페 식당이라해도 이미 배가 부른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굶은 사람에게는 꽁보리 밥에 김치 하나만 갖다 줘도 얼마나 맛있는지 모릅니다. 임금님 수랏상이 부럽지 않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 최고의 말씀 강사를 모시고 오면 우리가 은혜받고 변화되고 교회의 부흥이 올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한국 최고의 목사님이 와도 마음에 주림이 없고 영적인 갈망이 없다면 은혜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을 전해도 감동이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와서 말씀 사경회를 해도 부흥이 오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 그리고 핍박받고 있는 중국가정교회 성도들, 무슬림권 성도들은 성경책만 갖다 주어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은혜를 받습니다. 교회에 새롭게 등록하고 새가족들 성경 공부를 하다보면 눈망을 얼마나 맑고 초롱초롱하는지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눈물을 글썽거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정말 말씀을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그렇게 꿀꺽거리면서 먹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와도 무덤덤한 세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대를 향해 탄식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서 앉아 제 동무를 불러 /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11:16~17) 예수님 당시 어린아이들이 장터에서 하는 놀이가 있었습니다. 그 놀이의 규칙은 한편이 피리를 불면 다른 편은 춤을 추고, 한 편이 슬피 울면 다른 편은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면서 탄식 하셨습니다. 말씀에 반응이 없는 강팍하고 완악한 세대에 대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도 동일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영적 불감증의 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이 꽉 차 있어서 영적 갈망이 없는 배부른 자들을 향해서 뭐라고 하십니까? 25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지금 배가 불러서 귀한 것이 귀한 줄을 모르는 사람은 땅을 치며 후회할 날이 옵니다. 정말 내 안에 영력이 없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귀신을 쫓아낼 힘이 없습니다. 말씀으로 고난을 이겨낼 힘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너무나 연약하고 허약해져서 조그마한 유혹에도 무너지고 조그마한 상처에도 교회를 떠납니다. 우울증 두려움 염려가 교회 안에도 차고 넘칩니다. 말씀이 그 영혼에 심겨지지 못한 영적불감증의 증상들입니다.

 

우리가 다시 hungry spirit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42:1)”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119:131)” 우리가 간절함과 갈급함, 헐떡임을 가지고 주님을 찾을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채워주시고 다시 영적으로 풍성케 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 안에 영적인 채움이 있을 때 다시 영적 능력이 회복됩니다. 영력과 영권은 영적으로 주린자들 안에 말씀이 채워질 때 나타나는 영적 힘입니다.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이 말씀을 통회하는 마음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지금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21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사람들이 왜 웁니까? 아픔이 있기 때문에 웁니다. 건강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자녀들에 대한 아픔 때문에, 부부관계의 아픔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웁니다. 심지어는 사명을 감당하다 억울함으로 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영혼을 품고 기도하다 우는 사람도 있도 심지어 영적으로 타락해 버린 시대를 품고 기도하다가 우는 의인의 눈물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남이 이라는 가수가 88년에 울고 싶어라노래를 불러서 히트를 시켰습니다. “울고 싶어라 울고 싶어라 이 마음 사랑은 가고 친구도 가고 모두다...떠나 보면 알 거야 아마 알거야

 

사실 울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항상 웃고 싶습니다. 매일 즐거운 일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울고 싶은 상황이 많이 생깁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서 울고 싶고, 억울해서 울고 싶고, 시험에 떨어져서 울고 싶고, 고난의 아픔을 감당할 힘이 없어서 울고 싶고... 그런데 주님은 이런 우는 마음에 복이 있다고 합니다. 반대로 25절에 보닌까 예수님은 화 있을찐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지금 웃기보다 우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사실 울 일이 없는데 왜 울라고 하십니까? 여기에는 끊임없는 삶의 결핍에 대해 울 수 있는 문제의식을 가지라는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거룩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육신이 약해서 눈물 날 때가 있습니다. 때로 교회 일 하다 속상해서 울 일이 생깁니다. 전도하다 완악한 영혼 때문에 울 일이 생깁니다. 직장 생활하다, 사업하다 자신의 한계 앞에서 울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교만하고 완악한 에베소 영혼들을 섬기다 속이 상해서 삼년 동안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했다고 했습니다(20:31). 예례미야는 멸망해가는 이스라엘을 바라 볼 때에 그 눈이 눈물에 상하고 창자가 끊어지며 간이 땅에 쏟아졌다고 했습니다(2:11). 다윗은 자신의 죄로 인해 눈물로 침상을 적셨다고 했습니다(6:6). 요셉은 자신을 노예로 판 형님들의 죄를 용서하면서 사무치는 마음으로 울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후에는 너희가 웃을 것이라고 위로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울 필요가 없는 세대, 좀 처럼 울지 않는 세대, 즐거움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세대. 그것은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주입니다

 

건강하고, 잘 먹고, 잘 살고, 그래서 희희낙락하며 아무 문제 없는 것만이 복은 아닙니다. 오히려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아프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울 수 밖에 없어서 하나님을 찾게 되고 기도하게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힘을 얻는 영혼이 진정으로 복이 있는 인생입니다.

 

서양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비가 와야 무지개가 생기듯 눈물이 흘러야 그 영혼에도 무지개가 뜨게 된다비가 온 후에 무지개가 뜨듯이 눈물이 터져야 그 영혼에 무지개가 생기게 됩니다. 울어야 영혼에 천국의 문이 열립니다. 스펄전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른 눈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오늘날 이 시대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눈물이 말라버린 것입니다. 비가 와야 굳은 땅이 부드러워지듯이, 눈물이 흘려야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말씀을 받고 감격할 텐데, 눈물이 말라 버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피눈물을 흘리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상하고 통회하는 눈물을 회복해야겠습니다. 내 죄로 인한 애통함의 눈물, 한 영혼을 향한 상한 눈물, 교회를 향한 눈물... 사명을 감당하다가 아파서 흐르는 눈물을 가집시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무지개가 뜨고 참된 기쁨과 참된 웃음을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22절 말씀입니다.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미움 당하고 버림 받고 욕을 먹을 때에 얼마나 힘듭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런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의기소침하거나 힘들어하지 말고 그날에 기뻐 뛰놀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으면 하늘의 큰 상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제대로 믿음으로 살고자 하면 핍박을 받게 됩니다. 선지자들이 다 그랬습니다.

 

26절에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오히려 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자 하면 불의와 타협하게 되고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 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살고자 하다가 박해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하늘의 상급은 더 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다가 오해 받고 배척 받을 때에 상처받지 말고 기뻐합시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가난하고, 주리고, 울고, 핍박을 받을 때 복이 있다고 합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복은 역설적인데 있습니다. 결핍이 오히려 삶의 복의 문을 엽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자신의 죄에 대해 애통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음이 청결한 자, 예수님 때문에 핍박 받는 자가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습니다. 반대로 자기 의로 가득찬 포만함과 부유한 마음은 교만을 부르고 나중에는 지옥으로 미끌어져 들어가게 합니다. 우리가 천국의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마음을 비워야겠습니다. 세상의 편안함과 안락함의 포만감을 버리고 갈급해져야겠습니다. 그때 하늘의 보화가 주어질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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