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43강
제목 :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본문 : 누가복음13:22~30
예수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두루 다니사 가르치시면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고 계실 때에 한 사람이 나와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이 사람의 질문의 핵심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 생각보다 적었기에 했던 질문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 기적을 체험하고 많은 사람들이 또 떡을 얻어먹을까 해서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26~27) 그리고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파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을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4~55) 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하면서 예수님을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예수님은 12제자들에게도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때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 가오리이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육신의 떡을 추구하고 눈에 보이는 땅의 복을 추구하는 무리와 영혼의 말씀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율배반적이어서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요한복음 9장 22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을 출교하기로 결정하는 장면까지 나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특별히 이 사람은 앞 절에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 몇 사람을 죽인 사건과 예루살렘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은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3,5) 하시자 좀 겁이 났던 것 같습니다. 또한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 비유를 통해서 “이 후에 만일 열매를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눅13:9)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자 “이러다가 나도 구원 받지 못하고 망하는 것 아닌가” 라는 두려움이 밀려왔던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주여 구원을 받을 사람이 왜 이렇게 적습니까?” 라는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24절 말씀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예수님은 숫자로 구원받는 사람이 많다 적다 혹은 신천지처럼 ‘구원받을 사람이 144,000명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많으냐 적으냐 하는 문제는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입니다. 따라서 숫자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에는 몇 명까지만 들어온다는 쿼터제가 없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요한계시록 7:9절에 보닌까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에 있도다”하고 찬송을 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 모두를 구원하여 그 수가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되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사실입니다. 구원받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들이 한결같이 찬송했던 사실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에 있도다” 고백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사람의 공로나 노력이 아닙니다.
구원 받을 사람이 많을까요? 적을까요? 라는 이 질문에 예수님은 구원받을 사람이 많다 적다 말하지 않으시고 단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좁은 문’은 예수님 자체를 의미합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할 것처럼 보이는 문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돈이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권력이 구원의 문으로 보일 때도 있고, 과학이 혹은 이념이 구원의 문으로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쾌락을 구원의 문으로 여기고 그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잠시 잠깐 유익을 주고 재미를 줄지 모르지만 구원을 주지는 못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참된 문이요, 참된 길이 되십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파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천국 문을 여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서 우리 모두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천국 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구원의 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이 문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잘 눈에 띄지 않습니다. 별로 인기 없고 얼른 들어가고 싶지 않는 좁은 문입니다. 심지어 교회에 다니는 분들도 진정한 복음의 의미를 모른체 종교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을 주는 줄로 착각합니다.
미국 오하이오주의 한 도시에서 675명의 사람들에게 여론조사를 했습니다. 질문은 간단합니다.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중 85%의 사람들이 이와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교회에 교인으로 등록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예배에 잘 참석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선을 행함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 성경을 읽음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 금욕생활을 함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 무엇을 믿든지 상관없이 자신이 믿는 것에 굳게 지킴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문입니다. 다른 구원의 문은 없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3:5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성적 깨달음이나 지식적 앎에서 구원이 오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마음이 변화되어 예수님을 마음의 주인으로 왕으로 모실 때 구원이 옵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천국의 보화가 감추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문이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그 분과 연합하고 그 분과 동행하고 그 분을 구원의 주님으로 모셔야 구원이 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왜 좁은 문이라고 표현했을까요?
오래전에 한국에서 잘 알려진 불교계 큰 스님이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는 불교보다 수준이 낮습니다. 불교의 교리, 이치를 깨달으려고 하면 수 십년 아니 평생을 해도 깨닫기 힘든데 기독교 교리는 너무 단순하고 간단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사람들에게는 단순하게 보이지만 그 복음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완성되기 위해서 창세 전부터 준비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시어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계시하시고 마침내 복음이신 아들이 성육신하시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성자 예수님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내용이신 예수님이 각 사람의 마음에 영접되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오셔야 했습니다. 사람의 이성과 의지로 깨달음으로 예수님을 영접 할 수 없었기에 성령님이 오셔서 복음이신 예수님을 영접하게하는 역사하심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오순절 마가다락방에 오시는 성령강림입니다. 성령님의 역할은 죄인들이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데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초대교회와 로마의 공권력에 의한 핍박의 시기에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만약 종교재판석에서 예수를 저주하면 살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면 죽게 되는 상황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할 수 없어 예수를 주시라 고백하여 핍박받고 출교당하고 심지어 순교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의 이성과 지성과 내 힘으로 하는 신앙이라면 핍박이 오고 공동체에서 쫓겨나고 죽음이 오는 두려움의 상황에 서면 예수님을 주시라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힘으로 거듭나서 좁은 문이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간 사람만이 핍박과 죽음의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주로 시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반드시 회개를 동반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좁은 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전제조건이 회개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의 문은 좁기 때문에 몸을 낮추고,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데 이것은 회개와 겸손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죄에서 구원받기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거쳐야 할 문은 회개의 문입니다. 무엇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데 가장 방해가 됩니까? 교만입니다. 자만입니다. 교만의 허리를 펴고 자만의 머리를 들고는 결코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죄에서 애통해 하는 자, 마음이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십중팔구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답합니다. 조금 더 생각하고 대답하는 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고 대답합니다. 둘 다 성경적인 대답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은혜와 믿음에 더하여 선행되는 중요한 구원의 조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회개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도행전2:38절에서 회개하여 죄사함을 얻으라 했습니다. 성경은 구원의 필수조건으로 가장 먼저 죄에 대한 회개를 요구합니다.
회개란 헬라어 ‘메타노에오’로 가던 길을 돌이켜서 바른길로 고쳐간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완전한 180도 U턴입니다. 이전의 마음이 바뀌어 완전히 새 마음이 된 상태입니다. 그 새 마음은 죄를 미워하고 의로운 삶을 갈망하는 마음입니다. 죄의 이전상태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회개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온 마음이 회개한 마음입니다.
이렇게 생각 해 볼 때 좁은 문 되신 예수님께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죄에서 떠나 새로운 삶을 힘써서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세상의 잔재미와 욕망, 자존심, 이기심을 내려놓고 오직 좁은 문 되신 예수님을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 가야 합니다. 왜 좁은 문 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고 힘써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매달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나에게 영생을 주기 위한 죽으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으신 것은 우리를 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저주당하심으로 우리가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는 부유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수치와 멸시와 천대를 받으심으로 우리는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좁은 문되시는 예수님께 들어가면 모든 죄의 쓰레기는 예수님이 가져가시고 예수님이 가져오시는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은 내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위해서 온갖 죄를 다 짊어지신 좁은 문 되시는 예수님께로 들어가야 합니다. 로마서 6장은 예수님과 합하여 세례받은 자의 삶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즉 좁은 문 되시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연합된 사람들인데 너희는 이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장 11~12)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과 연합된 사람은 몸의 욕망대로 살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새로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몸을 불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않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입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삶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삶으로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좁은 문 되신 예수님께 들어가면 우리는 반드시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좁은 문 되시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면 처음에는 불편하고 망할 것 같지만 결국은 생명의 길입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 그분과 동행하면 푸른 초장 맑은 시내 물이 나옵니다. 좁은 문 되시는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결코 실망 시키지 않습니다. 이단들처럼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영원한 천국을 선물로 주십니다. 금보다 귀한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 주십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주님은 24,25절에서 구원의 문에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자들이 많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의 문밖에 서서 구원의 문이신 예수님께 나아가 문을 두드리며 사정을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길거리에서 가르치실 때에 저도 거기 있었습니다. 주님의 설교를 감동하면서 들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는체 하지 않습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호통치십니다. 주님과 좀 안면이 있다고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몇 번 교회에 왔고, 예배에 참석했고 부흥집회 찬양집회도 참석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을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았느냐의 문제입니다. 주님은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내게서 떠나 가라고 하십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욕심과 세상 가치관대로 사는 자들은 그 날에 밖에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반면에 이방인일지라도 주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겸손히 순종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들에게는 천국 문이 열리지 않았을까요? 왜 예수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했을까요? 회개의 문을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 되시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과 연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이나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을 집안으로 들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모르는 사람을 천국으로 들이지 않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데 예수님에게는 모르는 사람이 되어 문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하고 문을 두드리고 있지는 않는지요? 한 어리석은 사람처럼 “구원받을 사람이 왜 이렇게 적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지 맙시다. 대신에 “나는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고 있는가?” 묻고 그 질문에 답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좁은 문 되시는 예수님께 들어간 사람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면서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을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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