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73강
제목 : 십자가를 향해 가는 고요한 마음
본문 : 누가복음23:1~5
도스토예프스키는 “나는 나의 고통이 의미 없어질 때가 가장 두렵다”고 했습니다. 의미가 없는 고난은 사람을 가장 크게 무너뜨립니다. 반대로 내가 겪는 고통에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어떤 시련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해석된 고난은 고난이 아니다’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인생의 의미’를 놓아버리는 순간, 시련과 고통을 견뎌내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는 ‘절대 고통’으로 변해버린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요셉은 10명의 형들의 시기함을 받아 애굽의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 형들에게로부터 은 20에 노예로 팔려 애굽에서 노예살이하는 그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팠을까요? 그러나 요셉은 상처투성이인 체로 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평안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노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의 얼굴에 얼마나 평안과 기쁨과 지혜의 빛이 충만했는지 주인 보디발이 가정의 총무로 삼았습니다. 왜 고난이 요셉을 무너뜨리지 못했을까요? 하나님이 주신 2번의 꿈을 통해 자신의 인생의 큰 목적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꿈은 자신의 곡식단에 형들의 곡식단이 둘러서서 절하는 꿈이었고 또 한 번의 꿈은 해와 달과 11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통치자가 되는 꿈이었습니다. 이 꿈이 자신의 내면에 깊이 각인되었기에 고난이 와도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한 열정의 삶을 살게 했습니다. 후에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형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나를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4~5)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통해 자신의 인생 속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과 고난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뜻인 애굽의 총리가 되어 많은 생명을 구원하고 만민 구속사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십자가를 향해 가는 고요한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해석된 고난은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생긴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탄생 때부터 그리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고백으로 공생애를 마치는 모든 시간이 십자가를 향해 가는 치열한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탄생 때부터 해롯 왕의 칼날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장로들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간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로부터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을 받자마자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공개적으로 가르치시기 시작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무려 4번씩이나 예루살렘에서 고난받아 죽게 될 것을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을 하실 때 누가복음 9:51절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이 말씀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피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단단히 마음을 먹고 마지막 전도 여행지인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적과 방향과 비전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이 뜻을 가로막자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마가복음10:45절에서는 자신의 삶의 방향과 정체성에 대해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성육신하셨고, 영혼을 섬기고자 말구유 위에 누우셨습니다. 무엇보다 공생애 마지막 순간 살고 싶은 육신의 소욕을 부인하고자 땀방울이 피 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심으로 마침내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하시면서 십자가에서 저주받아 죽는 이 일에 마음을 확정하고 확정하셨습니다.
이후 예수님의 행보는 잠잠히 고요히 담대하게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더 이상 마음의 갈등이 없습니다. 더 이상 답답한 마음이 없습니다. 고요한 아침의 호수처럼, 파란 가을하늘의 맑음처럼 주님의 마음에는 평온함이 있었습니다.
모압 여인 룻이 아무런 소망 없는 쫄딱 망한 집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유대로 가고자 할 때 분명한 결단이 있었습니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1:16~17) 룻의 이 고백은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아무리 큰 고난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는 결정입니다. 죽음 외에 내가 가는 이 길을 막을 수 없다는 일사각오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남들이 염려하고 걱정하듯이 바라보아도 그녀의 마음은 평온했습니다. 젊은 나이닌까 재혼하면 인생 풀릴텐데 계산하는 사람들의 만류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주님 안에서 뜻이 서고 마음이 확정되면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룻은 유다 땅 베들레헴에 와서 시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가서 이삭을 줍겠나이다”(룻2:2) 밭도 논도 없습니다. 모아둔 적금도 없습니다. 쌀은 다 떨어졌습니다. 요즘 같으면 기초연금제도가 있을 텐데 당시에는 그런 복지 제도도 없었습니다. 룻은 일일 노가다 하러 인력시장에 가겠다고 합니다. 폐지라도 주어서 입에 풀칠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참하지 않습니다. 내일이 없는 오늘이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살만한 오늘이고 희망있는 내일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에게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가서 이삭을 주워 먹을 것을 구해 오겠다고 합니다. 유대인 총회에 못 들어오는 저주받은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쫄딱 망한 집안의 과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믿음의 결단으로 시어머니를 따라왔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평온했고 고요했고 잠잠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이삭줍기를 하러 나가는 것입니다. 결단이 서고 마음이 확정되면 방안에서 웅크려 있지 않고 이삭을 줍고자 나갑니다. 집에 쌀이 떨어져서 내일의 삶이 불안하지만 두렵지 않습니다. 담대히 이삭줍기라는 십자가를 향해 나갑니다. 그 때 보아스를 만났고 메시야의 조상인 다윗의 증조모가 되는 축복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새숲교회를 개척하면서 건축을 했고 개척 1년째에 5억이 넘는 빚을 졌습니다. 힘든 상황에서 개척맴버들이 11명 떠났습니다. 현재 있는 맴버들도 다들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불안하고 두렵고 망할 것 같았습니다. 전세금까지 건축비에 넣었습니다. 만약 이자를 갚지 못하면 파산하고 쫓겨나면 갈 곳도 없었습니다. 그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 개척하다 망하기 직전입니다. 그런데 주님 제가 개척도 해보고 건축도 해보고 하나님께 저의 모든 것을 바쳐 여기까지 왔습니다. 혹시 개척 실패해서 이자 못 갚고 파산하면 책임지고 감옥이라도 가겠습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이 여기까지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부족한 저를 교회를 개척하는 영광을 누리게 해주셔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을 갖자 마음이 홀가분해졌습니다.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습니다. 고요한 마음이 생겼고 앞으로 닥칠 그 어떤 환난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놀랍게도 개척 2년 후부터 재정자립을 이루는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된 상태에서 십자가를 향해 가는 고요한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제자였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군대를 이끌고 예수님을 잡으러 겟세마네 동산에 나타났습니다. 가룟 유다가 저분이 체포할 예수라는 배신의 신호로 랍비여 부르면서 입맞춤을 합니다. 유다는 사랑과 존경의 표시인 입맞춤을 배신의 신호로 사용했습니다. 뺨이라도 때려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입맞춤을 받아줍니다. 심지어 베드로가 예수님을 지킬려고 칼을 휘두르다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어 떨어뜨렸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종의 귀를 만져 낫게 해 주셨습니다.
위기의 순간이 오자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습니다. 베드로는 3번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평온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여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가서 밤새 심문했습니다. 22장 63~65절 말씀입니다.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이 외에도 많은 욕을 하더라” 감히 피조물이요 죄인인 인간이 창조주 예수님을 희롱하고 때렸습니다. 예수님의 눈을 가리우고 때리면서 “너를 친 자가 누구냐? 네가 선지자라면 알아맞혀 보라” 했습니다. 이 외에도 더럽고 악의에 찬 수많은 말로 예수님을 욕하였습니다. 어떤 자는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어떤 자는 발길질을 하고 어떤 자는 뺨을 때렸습니다. 성경에는 부모를 때린 자는 죽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여러 명의 자식이 부모의 눈을 가리고 때리고 침 뱉고 욕하고 누가 했느냐 맞혀보라고 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요 창조주이신 예수님을 희롱하는 것은 자식이 부모를 때리는 것보다 더 악한 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잠잠히 참으셨습니다.
날이 밝아오자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그들은 공회에 예수님을 세우고 공식적으로 재판했습니다. 그들은 네가 그리스도라면 우리에게 그리스도인 것을 말하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말하면 신성 모독죄로 예수님을 죽이고자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해도 그들이 믿지 않을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그리스도로 생각하는가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눅22:69) 예수님은 자신이 만왕의 왕이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증거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직접적으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분명히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셨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께 신성 모독죄로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23:1~2절 말씀입니다.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이스라엘 최고 명절, 유월절을 맞이한 성금요일! 예루살렘 성전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돌았습니다. 그들은 밤새 예수님을 심문하고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여 신성을 모독한다고 하여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사형 집행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끌고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갔습니다. 예수님은 두 손이 결박당한 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죄수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무리들은 빌라도 앞에 도착하자 예수님을 쓰레기봉투 버리듯 던지면서 고소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합니다!"
‘그리스도’ 라는 단어는 정치적 왕과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에 로마 황제를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왕으로 다시말해 로마의 반역자로 고소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되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고 자신이 세금을 거두려 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인들이 매우 민감하게 생각하는 반역 문제, 세금 문제로 고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치적인 왕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유대인을 통치하는 왕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물어보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정치적 왕으로 인정되면 예수님은 반역자로 처형을 당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에 "네 말이 옳도다" 말씀하시며 유대인의 왕으로 자신을 시인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과 왕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듯이 유대인의 왕도 정치적인 왕과 그리스도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동방박사는 유대인의 왕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인류의 구원자 그리스도를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고 하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로 오신 자신을 부정하게 되십니다. 예수님은 죽을 것을 아시면서도 자신을 유대인의 왕으로 시인하셨습니다.
이 때 빌라도가 즉각적으로 선언합니다. 4절입니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은 죄가 없도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노련한 재판관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빌라도에게 중대한 세 가지 죄목인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며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누가복음에만 예수님께 대한 빌라도의 무죄 선언이 세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4절에서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서 죄가 없도다” 14절에서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 22절에서 ”나는 그에게서 죽을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예수님을 심문한 헤롯도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고(15절), 강도와(39-43절) 백부장도(47절) 예수님의 무죄를 증언했습니다.
그렇다면 설명할 수 없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창조주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는 아무 죄도 없으십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불의한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신 이 길을 잠잠히 가셨느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원하여 이 모든 일을 당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져야 할 그 죄 값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뿐만아니라 의의 열매로 부활하사 예수님이 완성하신 그 의를 우리에게 주시고자 함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사 믿는 자들을 구원해 주시는 복음을 완성하고자 이 길을 가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고통 뒤에는 반드시 부활의 영광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저주받으러 가는 길이 아니라 부활로 가는 문입니다. 십자가는 실패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 입성하는 영생의 문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럽지만 그 끝에는 생명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의미 있는 고난입니다. 뜻이 있는 십자가입니다. 왜 잠잠히 고요히 거침없이 담대하게 십자가의 길을 향해 나아갔을까요? 십자가 뒤에 하늘 보좌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믿음의 길을 가면서 어느 수준까지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셨습니까? 욕먹을 각오 멸시받을 각오 수치와 조롱을 받을 각오 어느 정도까지 감당하고자 결심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배신당하고 종교지도자들에게 희롱당하고 무리들에게 구타당하고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고 발길질 당하고 뺨을 맞기도 하고 채찍에 맞고 자존감을 뭉개는 더러운 욕을 바가지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길을 묵묵히 고요한 마음으로 가셨습니다. 그 힘은 이 길만이 인류를 죄와 사망 권세에서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의 고난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큰 십자가도 의미가 있고 뜻이 있으면 묵묵히 감당할 힘이 생깁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음을 알기에 우리도 고난의 때에 기도하면서 끝까지 이 믿음의 길을 인내로서 잘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 뒤에 부활의 영광, 하나님이 준비한 상급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가 있는 신앙생활 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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