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노트

누가복음62강(제목: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2025-12-21 06:47:13
김성철
조회수   8

누가복음 62

제목 :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본문 : 19:35~40

 

세계적인 복서였던 조 프레이저가 했던 말입니다. 링에 올라갈 때 복서는 이기기 위해 나가는 게 아니다. 이길만한 실력이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확인시켜 주러 나가는 것이다. 수많은 연습으로 축적된 능력이 단 몇 분의 시합에 터져 나와 확인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수많은 시간을 준비했고 그 노력의 결정체가 그 짧은 링에서 승리로 드러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인류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는 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수님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준비하셨을까? 그리고 십자가에서 승리는 하루아침에 준비된 순간적인 승리가 아님을 생각해 봅니다. 사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할 때부터 이 십자가는 준비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자 곧바로 하나님은 원시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3:15) 앞으로 오실 여자의 후손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네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사탄이 가진 죄와 사망의 권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보혈의 피를 흘리심으로 인류를 옭아매고 있는 죄와 사망의 쇠사슬을 끊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는 순간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여정은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할 때 또 한 번의 십자가를 지는 예행 연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신제사를 드리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독자 이삭을 모리아 땅 한 산에서 번제를 드리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하여 외아들 이삭에게 칼을 들어 내리치려는 순간 하나님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 순종을 막으시고 한 어린양을 준비하여 그 것으로 번제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3천년 후 예루살렘 골고다에 번제로 드려지는 외아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대로 수용하셨습니다. 아들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외칠 때도 고개를 돌리셨습니다.

 

이런 십자가의 행적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던 유월절 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것으로 또다시 예시되었습니다. 그리고 레위기에 나타난 번제단에서 드리는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의 어린양의 피는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위해 드려야 하는 십자가의 보혈을 상징했습니다. 피를 바를 때 죄가 속해지는 율법은 곧 하나님의 공의였습니다. 피는 생명이고 죄의 값은 그 사람의 생명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나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는 내 생명의 대속의 값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실 때 예수님의 누울 자리는 왕궁의 황금 침대가 아니라 세상에서 버림 바 된 냄새 나는 말밥통 위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의 비전과 목적을 한마디로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 예수님의 평생 33년의 모든 삶의 방향은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인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려 세상에 나오실 때 세례요한은 제자들에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1:29)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저주받아 죽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누가복음 9:51절에서 마지막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길을 나선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여기서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란 십자가에 죽고 3일 후에 부활하실 것을 염두해 둔 말씀입니다. 이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러 가는 길입니다.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도망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러 가는 마지막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길을 굳게 결심하고 가셨습니다. 자기부인의 길입니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갈 수 없기에 굳게 결심하고 매일 새벽마다 기도하시면 마지막 예루살렘을 향해 십자가의 발걸음을 내딛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베드로가 그 길을 막으면서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16:22)하실 때 사탄의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책망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마져 십자가의 길을 막으면 사탄이라고 책망하셨던 주님이십니다.

 

오늘 본문도 그것이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십자가를 지로 가는 길 어정쩡하게 가지 않고 담대히 앞서서 가셨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앞 절의 열므나의 비유의 결론과 앞서서 가시는 예수님의 행동이 절묘하게 연결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열므나 비유에서 귀인이 왕 됨을 그 백성이 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 되심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조롱하고 멸시하고 시기하여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매달아 죽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죽음이 끝이라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열 므나의 비유에서 왕은 다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으신 후에 다시 살아나시고 승천하셔서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실 것입니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원수들을 죽인 것처럼 예수님은 자신을 대적하고 부인한 이들을 결국은 심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결론을 아시고 반대자들의 도시인 예루살렘을 향해 앞서서 가신 것입니다.

 

이토록 십자가를 지는 공생애를 매일 매일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 날이 결정되었을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 할 수 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괴로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한 번의 십자가의 사건으로 믿는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고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여 새새토록 왕노릇하는 이 삶을 너무나 쉽게 가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그 한 번의 순종을 평생을 아니 창세전부터 마음에 결심하고 준비하고 또 준비하고 성육신하셔서 또 결심하고 기도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는 것입니다. 결코 쉬운 십자가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승리는 단번의 결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 그 십자가의 고통이 한 번의 고통이 아니라 평생을 마음 조리며 고뇌속에 준비한 결과임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가지 모습으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 믿음의 선한 응답을 해야 합니다.

 

첫째로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내 인생을 기꺼이 풀어서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2명의 제자들에게 맞은편 마을에 가서 한번도 타보지 않은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볼 것인데 그것을 그냥 끌고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제자들이 나귀를 풀면 주인이 "어찌하여 남의 나귀를 풀어가느냐" 라고 물을 때 "주가 쓰시겠다"라고 대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풀어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명령을 그대로 영접했습니다. “예수님, 무슨 그런 도둑질을 시키십니까?” 하고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과연 주인이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주인에게 주께서 쓰시겠다고 담대히 말했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 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귀를 가져가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나귀새끼를 끌고 왔습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통해 이 나귀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나귀의 주인의 주인이심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귀의 진정한 주인이십니다. 나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이 땅에 있는 나귀의 주인은 나귀의 관리자입니다. 예수님은 나귀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 자신이 필요한 때 나귀를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도 우리의 직장도 주님의 것입니다. 주가 쓰시기를 원하면 관리자는 언제든지 모든 것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지나친 영적해석이라고 할지라도 저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겠다고 하면 나의 삶이 풀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매여 있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는 질병에 매여 있고, 물질에 매여 있고, 인간관계에 매여 있습니다. 사건 사고에 매여 있고 죄와 사망에 매여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고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것에서 풀어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겠다고 하면 우리의 병에서 풀어주시고, 가난에서 풀어주시고, 인간관계의 맺힌 것에서 풀어주십니다. 죄와 사망에서 풀어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쓰임 받고자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번에 케냐 의료선교를 마치고 당회원 카톡방에 고영춘 장로님이 올린 글입니다.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몸은 분명히 이전보다 더 피곤해졌고 예기치 못한 육체의 가시하나가 남아 있음을 느낍니다. 진료 일정은 빡빡했고, 낯선 환경과 기후, 제한된 의료 자원 속에서의 하루하루는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몸은 지치고, 체력은 고갈되었으며,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하는 마음이 스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용히 돌아보니, 이 여정은 육체를 소모시키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을 다시 살리는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약이 부족해도 감사하는 환자들의 눈빛, 짧은 진료 한 번에도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하던 모습, 그리고 그 모든 만남 속에서 네가 여기 있어야 할 이유를 조용히 확인시켜 주신 하나님 ... 그래서 오늘, 이 피로와 가시를 원망하기보다 영적인 건강이 회복된 이 은혜를 감사로 고백합니다. “

 

참 마음을 울리는 글이었습니다. 사실 장로님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가 쓰시겠다 했을 때 나귀의 주인처럼 그리고 한 번도 사람이 타보지 않는 나귀처럼 자신을 주님께 내어드렸습니다. 이 내어드림이 본문의 말씀처럼 메어있는 모든 것에서 풀어지는 은혜로 우리 주님께 응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더불어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주가 쓰시겠다 할 때 순종함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림으로 메어 있는 것에 풀어지고 우리의 삶이 주님의 영광스러운 도구로 아름답게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주가 쓰시겠다 할 때 우리를 드리면 손해 볼 것 같지만 사실은 엄청난 은혜를 덧입고 내 영혼이 잘되고 마음은 더 튼실해지고 삶을 더욱더 부요해질 것을 믿습니다.

 

두 번째로 십자가에서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매일 찬양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어린 나귀 위에 자기의 겉옷을 놓고 예수님이 가시는 길바닥에 자신들의 겉옷을 깔고 종려 나무를 흔들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19:38) 목이터져라 외쳤습니다. 왜 이렇게 찬양 한 것입니까? 예수님이 지금까지 행하신 기적과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리고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대로 행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4:18~19) 이사야 선지가 예언한 메시야 사역을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 저분이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저분이 그리스도 곧 메시야가 틀림없겠구나 확신하고 예수님께 찬송을 드린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다윗왕처럼 메시야 왕국을 지상에 건설할 것으로 기대한 찬송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보다 더 큰 인류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독립시키기 위한 십자가의 순종의 입성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리들이 예수님이 왕으로서의 입성을 찬송할 때 몇몇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환영하고 찬송하는 일을 못땅하게 여겨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했을 때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19:40)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무리들이 예수님이 선지자인데 잘 모르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찬양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무리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나와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찬양하는 제자들을 책망해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찬양하는 무리를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찬양하지 못하게 하는 책망해 달라는 사람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찬양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질러 찬양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행하신 모든 일에 대해 찬양받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독립시키시는 왕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예수님을 찬양하지 말라고 제지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의 찬양을 막지 않았습니다. 적극적으로 찬양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막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의 독립보다 더 큰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죄와 사망으로 다스리는 사탄의 나라에서 의와 평강으로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의 독립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 36년 식민지 통치에서 독립이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독립되어 진리 안에서 자유의 인생을 살고있는 이 삶에 대해서 목이 터져라 하나님 나라 만세를 외쳐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목이 터져라 부르는 찬양의 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찬양할 때 시큰둥합니다.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입을 열지 않습니다. 눈빛에 찬양의 감격이 없습니다. 다시 목이터져라 부르는 찬양의 불이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번 경배와 찬양예배 때 우리가 얼마나 목이 터져라 찬양했습니까? 이 찬양이 우리 모두에게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찬양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사탄이 가장 싫어합니다. 찬양은 사탄의 공격에 대해서 믿음의 방패를 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찬양하면 사탄이 도망칩니다. 뜨거운 찬양은 악한 영들에게 공포를 심어줍니다.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 찬양은 원자폭탄보다 더 강력한 무기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면 그 자비를 연장하는 것이고 불행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면 그 불행을 끝내는 것이다 쉽게 말해 찬양을 하면 좋은 것은 더 좋게 연장이 되고 불행한 것은 끝내게 한다는 뜻입니다. 결코 찬양할 때 침묵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돌들이 소리지릅니다.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우리 모두가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의 복음을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바랍니다. 주가 쓰시겠다 할 때도 삶이 풀어지지만 찬양할 때도 모든 묶임에서 풀어지고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은혜가 더 크게 임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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