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41강
제목 : 타인의 불행을 볼 때 우리가 할 일
본문 : 누가복음 13:1~5절
미국 유학 갔던 어떤 목사님이 설교 중에 잊혀지지 않는 한 친구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결혼하기 전 휴스턴에 있는 교회에 출석하면서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교통경찰한테 딱지를 떼었다면서 그 때의 상황을 말해주었습니다. 고속도로에서 과속을 하는데 경찰차가 불빛을 밝히면서 오길래 길 옆에다가 차를 세웠다고 합니다. 경찰이 자신에게 와서 범칙금을 부과하려고 하길래 친구가 경찰한테 말하기를 자신은 학생이고 처음으로 교통위반 티켓을 받는 건데 잘 좀 봐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경찰이 하는 말이 ”당신이 처음 경찰한테 걸렸다고 해서 당신이 그 동안 교통법규를 잘 지켜서 안 걸린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 동안 법을 어겼어도 안 잡혔던 것이니까 그렇게 억울해 하지 말라“ 이렇게 말하더니 티켓을 떼더랍니다. 그 말은 들은 그 친구가 얼굴이 화끈거려 더 이상 말도 못하고 그냥 벌금 티켓을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매일 죄를 짓고 삽니다. 여기 계신분들 중에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과 그 하위법인 613가지 율법을 나는 단 하나도 어기지 않고 살아왔노라고 장담할 수 있는 분이 계실까요? 우리는 단 하루동안도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키면서 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알고 죄를 짓기도 하고 모르고 죄를 짓기도 합니다. 미움 시기 분노 정죄 탐욕 음란 거짓말 교만 무정함 판단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하나님을 불신하기도 하고 불순종하면서 매일 매일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보고 비난도 잘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알아채지 못합니다. 신종 현대어 중에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하면 로멘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는 말입니다. 이와 비슷한 속담이 있습니다. ‘가랑 잎이 솔 잎 더러 바스락거린다’는 속담입니다. 사실 가랑잎을 밟는 게 솔잎을 밟는 것 보다 소리가 더 크게 납니다. 자기의 허물은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남의 허물만 나무라는 경우를 빗대어 말하는 속담입니다. 우리 가운데 ‘내로남불’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가랑 잎이 솔 잎을 향해 바스락거린다고 비난하는 것처럼 내 허물은 보지 못하고 남의 허물을 더 크게 보면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경우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말씀은 ‘타인의 불행을 볼 때 우리가 할 일’ 입니다. 남의 불행을 보면서 우리는 주로 어떤 생각을 하고 또 어떤 말을 합니까? 남의 불행을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지는 않습니까? 남의 불행을 볼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두어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소식 하나를 전합니다. 도대체 어떤 충격적인 일이 터졌길래 사람들이 직접 와서 예수님께 알렸을까요? 이 소식은 총독 빌라도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던 갈릴리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이 드리는 제물에 그들의 피를 섞어 버린 엽기적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에 대한 반란이 자주 일어났고, 그 주동자들이 갈릴리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마도 빌라도의 군사들이 수상한 갈릴리 사람 몇을 반역 주동자로 여겨 죽였고 일벌백계로 이들의 피를 희생 제물의 피와 섞어버렸던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불행한 사고, 갑작스러운 재난이나 비참한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죽은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죄를 더 많이 지었기 때문에 벌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의 보편적인 인과응보적 해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 예수님은 ‘누구는 죄가 많아서 큰 벌을 받고 재앙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의롭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그들이 먼저 재앙을 당한 것 뿐이지 너희들도 다 재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죄 가운데 있다면 우리도 똑같이 망하고 말 것이다는 경고입니다.
4절에 보면 예수님은 또 한 가지 사건을 더 언급하셨습니다. 당시에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는 큰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놓고도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다른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번에도 동일하게 ‘아니라’ 강하게 부정하시면서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살아있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보다 더 의로운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똑같이 망하게 됨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타인이 당하는 불행한 사건을 보면서 함부로 정죄하거나 비난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겪는 불행을 내가 겪지 않는 것은 그 사람보다 더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언제든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고난임을 인정하면서 고난 중에 아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주님은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죄의 경중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죄로 인해 멸망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도, 빌라도에게 죽어간 갈릴리 사람이나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치어 죽은 18명의 예루살렘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는 죽어도 할 말 없는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일본이 쓰나미 사고를 당하고, 중국이 지진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그 나라 사람들이 우리보다 죄가 많을까요? 남한은 잘사는 반면에 북한은 계속해서 흉년을 드는 것을 보고 남한 사람이 북한 사람보다 의롭다고 말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죄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의 죄의 가볍고 무거움은 사실 오십보백보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선포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교통위반 딱지 한 번도 안 받았다고 해서 단 한번도 교통 위반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어긴적이 있었지만 안 걸린 것뿐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죄가 다 있습니다.
심리학에서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방어기제가 있다고 합니다.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고자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고 변명하고 심지어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거나 아는 바 없다고 둘러댑니다. 남들이 죄를 지적하면 오히려 역정을 냅니다. 마치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하고서는 하나님이 네 아우 아벨이 어디있느냐? 물을 때 “나는 알지 못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역정을 내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현장에서 간음하다 현행범으로 체포된 한 여인을 성전마당에 세웠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돌을 들어 쳐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면서 그들에게도 똑같은 죄가 있음을 상기시켜주었습니다. 과연 어른들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돌을 내려놓다 다 돌아갔습니다. 다들 양심에 찔린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똑같은 죄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성폭행범으로 수감된 세 명의 죄수가 아동 성추행범을 폭행해서 숨지게 한 것입니다. 조사해 보니 그 세 명은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습니다. 만날 때 마다 그를 때리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임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애를 건드릴 수 있냐” 자기들도 성추행하고 감옥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자기가 범한 죄악에 대하여는 관대합니다. 내로남불입니다. 같은 상황에 대해서 자신이 하면 옳은 일이고 남이 하면 잘못한 거라며 상대방의 잘못을 크게 들춰냅니다. 자기합리화이고 정신승리일 뿐입니다. 왜 내가 하면 옳은 것이 되고 남이 하면 그른 것이 됩니까?
공자가 했던 말입니다. 삼인행필유아사언(三人行必有我師焉)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그 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뜻입니다. 나와 걸어가는 두 사람 중에는 반드시 내게 없는 장점을 가진 사람이 있을 것이니 나는 그 장점을 취하고, 또한 단점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니 내게도 그런 단점이 없는지 반성하고 경계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됨을 정확히 안다면 나보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할 것 없이 그 모든 사람이 나의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잘난 사람만이 아니라 나보다 못한 사람도 나의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대부분 남의 불행을 판단하면서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흉봅니다. 그 불행에 돌을 던집니다. 사실 그들도 똑같이 그 일을 행했으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은 의롭다는 의인증에 빠져 삽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쓰는 말 중에 ‘나는 법 없어도 살 사람이다’며 자기를 선하게 여기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망하리라” 경고하십니다.
시편 19:12~13절은 자신의 허물과 죄를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다윗의 기도문입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가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회개만이 내 안에 있는 죄 문제를 대하는 올바른 반응입니다. 죄를 묻어 두고 회피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다 드러날 것입니다. 남들보다 덜 심각하다고 변명해 봐야 의미 없습니다. 오십보백보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핑계를 대봐야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소용없습니다. 다윗처럼 “누가 자신의 잘못을 낱낱이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모르고 지은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알며서 죄를 짓지 않게 막아 주시고, 그 죄들이 나를 휘어잡지 않게 하여 주소서! 그러면 큰 죄에서 벗어나 내가 깨끗해질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회개해야 합니다. 심지어 고의적으로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다윗처럼 간음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 줄 알면서도 정욕의 힘을 이기지 못해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을 감추려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였는데 살인죄가 얼마나 엄청난 죄인 줄 알면서도 죄의 힘이 그를 휘어잡아 살인죄를 짓도록 끌고 갔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마터면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될 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할 수 있도록 나단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의 하나밖에 없는 자식같은 어린 양을 잡아 손님 대접한 그 사람이 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을 때 다윗은 회개했습니다. 고의적으로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알면서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나약한 의지 육신의 강력한 욕망 이것이 우리를 고의적으로 죄를 짓게도 합니다. 그렇다고 망합니까? 주님은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주시고, 또 주시고, 포기치 않으시고 또 주십니다. 그 때 회개하면 됩니다. 사람이 멸망하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아서입니다.
많은 사람이 회개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죄를 지어서 회개하고 또 짓고 나서 회개할려니 주님 앞에 죄송해서 못하겠어요! 벼룩도 낯짝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죄송한 것이지 회개하는 심령을 주님께서는 너무나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합니까? 라고 예수님께 질문하자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나에게 죄짓는 사람에게 끝없는 용서를 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너희가 연약하여서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좌절하지 말고 다시 일어서서 회개하고 새로운 하루를 살라! 회개하는 자에게 나는 무제한 그를 용서할 만한 사랑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 자신의 죄에 대해서 애통해 하는 사람, 남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마음이 청결한 사람,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그 사람이 복있는 인생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했다면 회개의 열매를 맺기까지 지속적으로 회개의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의 열매를 맺기까지 회개의 삶을 반복해야 합니다. 내 안에서 생각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 언어의 변화, 습관의 변화, 인격의 변화가 일어나기까지 염치없지만 회개하고 또 회개하면서 마침내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하는 것은 회개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성도들에게도 고난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시험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자녀가 무너지기도 합니다. 암에 걸립니다. 사업에 실패하기도 합니다. 교통사고 나서 불구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갑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훈련하시고, 심지어 고난을 통해서 더 깊은 믿음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히브리서 12장 6,7절 말씀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보면 믿는 자에게 고난은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은혜의 샘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운 좋게 남들이 겪는 고난, 불행, 그러한 재앙을 당하지 않고 살면 그것이 축복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것이 결코 행운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불행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때로는 악인도 이 땅에서 재앙 당하지 않고 오히려 잘 살 수 있고 부귀영화 누리면서 살 수 있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73편에 보면 악인들이 세상에서 너무도 잘되는 모습을 보면서 의인이 시험에 빠진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라”(시731~3) 악인이 때때로 의인의 삶보다 더 형통하고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심판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통해 자신을 살피고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것은 그 형통함으로 인해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자신의 잘난 맛에 살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다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악인들은 회개할 기회를 주지 않고 그 교만과 완악함 대로 살다가 심판받도록 내버려 둠의 심판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실패와 아픔을 겪으면서 하나님께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찾는 영적 가난함이 축복이요, 은혜일 수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볼 때마다 먼저 내 안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뉴스를 보면서 다른 사람의 불행한 소식이 전해질 때 그 사람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내 안에는 그런 모습은 없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찰스 스펄전은 말했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죄의 씨앗은 점점 자라기 시작합니다. 극악무도한 죄인도 작은 씨앗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그 심령에 죄의 씨앗이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내재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 직면하면 그 씨가 싹 뜨고 자라서 죄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므로 매일 내 마음을 성찰하면서 죄의 싹을 잘라야 합니다. 죄의 힘이 자라지 못하도록 그 뿌리부터 잘라내는 회개의 삶을 날마다 살아야 합니다.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힘이 내 안에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은총의 힘으로 회개하여 우리의 삶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질 때 우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고 왕같은 제사장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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